고향집에 들렀다가 아주 반가운걸 만났다.

봉냥이다.

표준어론 복령이라 한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내가 고향서 살땐 내고향집 주변엔 항상 이 봉냥이 말려지고 있었다.

내 아버지께서 봉냥쟁이 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근에선 알아주던........

아버지께선 농한기 때마다 이 봉냥을 캐서 집안살림을 이어 가셨다.

새벽에 망태기를 짊어 지고 나가셔선 한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곤 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밟으셨던 산줄기들을 이젠 내가 밟고 있다.

먹달 , 항갑골 , 방산저수지 , 삼배실 , 배티 , 농은리 , 세심사 , 송석저수지 , 산양리 , 강청리 , 응봉 , 오형제고개 , 애미니고개 등등등.........

당시에 아버지께 얼핏얼핏 들었던 지명 들이다.

저 지명들중 대부분은 확인을 했고 또 얼추 다 밟아봤다.

다만 먹달과 항갑골은 아직 어딘지 확실히 모르겠는데 아마도 대술면 상항리 일대가 아닐까 추측만 해본다.

 

봉냥은 소나무 뿌리의 송진이 뭉쳐져서 생긴 한약재 라고 하던데 얼핏 뇌신경 계통에 좋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암튼 저 봉냥은 봉냥창이라는 꼬챙이로 땅을 쑤셔 그 느낌으로 찾아내곤 하는데 바로 저 느낌이란 거에 봉냥을 캐는 묘미가 있다.

나도 한땐 봉냥도 캐봤고 또 낚시도 해봤다.

손맛이란 관점에서 둘은 거의 같다.

봉냥창이 봉냥을 파고들때의 그 손맛이 미끼를 문 물고기를 채올릴때의 그 손맛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큰 물고기가 손맛이 크듯 봉냥역시 큰놈이 더 손맛이 좋다.

같은 크기의 물고기라도 힘이 센놈이 있고 약한놈이 있듯이 봉냥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간혹은 작은 봉냥이래도 엄청난 손맛을 느끼게 하는놈들도 있다.

봉냥쟁이들은 봉냥의 이 손맛을 '문다' 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손맛이 큰놈은 '무는힘이 세다' 라고 표현하고 , 손맛이 작은놈은 '무는게 션찮다'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거다.

낚시꾼들이 저 손맛 이란거에 맛을 들이면 헤어나기 힘들듯이 봉냥쟁이 역시 저 무는힘에 한번 빠졌다 하면 쉽사리 헤어나기 힘들다.

나역시 한땐 그래 봤다.

 

봉냥도 구분을 하자면 여러가지 다.

우선 색깔에 따라 백복 , 황복 , 적복이 있다.

그중에서 백복을 최고로 치는데 값도 약간 비쌌던걸로 기억한다.

찾아보니 백복은 적송에서 , 황복과 적복은 곰솔에서 난단다.

또 아주 간혹은 똥복이라 불리던 검은색 계열의 봉냥도 있었는데 이름에서도 알수있듯 값어치가 아주 형편없는 봉냥 이었다.

그리고 별도로 심복이라 부르던 봉냥도 있었는데 이건 소나무의 뿌리가 관통하여 박힌 봉냥을 일컫는 말인데 심장인가 어딘가에 특히 약효가 있다하여 조금은 특별히 쳐줬던걸로 기억한다.

또 소나무가 죽고나서 3년가량이 지나면 봉냥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때 막 생긴 봉냥을 새복 , 한참 묵은 봉냥을 구복이라 불렀다.

같은 크기의 봉냥이라도 새복이나 구복은 무는힘이 약해 손맛도 크지 못했고 , 푸석푸석하여 양도 많지 않았다.

이렇게 봉냥이 단단하지 못하고 푸석푸석한걸 '설다' 라고 표현 했다.

 

그만하자.

오랜만에 봉냥이 널려져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깊이 들어가 버렸다.

다음에 직접 캐러 나서보자.

그리고 그때 다시 다뤄보자.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며 봉냥도 캐고 , 마도캐고 , 버섯도 따던 그때가 좋았다.

아버지께서 캐온 봉냥을 서로 까겠다며 동생과 다투던 그때가 좋았다.

아버지는 새끼들의 그런모습을 보며 힘든줄 모르고 산을 타셨을 거고........

내가 삶속에서 시달리다 지친 몸으로 현관문을 들어설때 서로 안겠다며 달겨드는 내 살점놈들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떨어내는 그것과 같은 이치 일게다.

 

 

 

 

 

 

 

 

' > 따거나 캐는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널널산행(뭐 캘거나 딸게 있나해서.......)  (0) 2010.07.11
일곱번째 산삼.  (0) 2010.06.05
창수랑 금묵이.  (0) 2009.10.26
마캐러 갔다가 술타령만.........  (0) 2009.10.26
마캐러.......  (0) 2009.10.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