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쇠러 시골에 간김에 지난번에 이어 내고향 구석구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져 한다.
머그네미 고사티 한복판서 바라뵈는 동대말의 모습이다.
동대말이란 명칭역시 어서 왔는지 알길은 없다.
어쨌든 저곳은 나 어릴적에 연날리기를 하던 주된 장소였고 , 또 저비탈선 구루마를 타기도 했었다.
구루마는 일본말인듯 한데 나무로 만든 일종의 세발자전거 정도로 이핼하면 될거다.
지금으로부터 35년전.
그러니까 1975년경 저윗사진과 동일한위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동대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위치에 그대로 서있다.
35년전 동대말은 민둥산 이었다.
변변한 나무 몇그루 보이지 않는다.
당시엔 나무가 땔감으로 쓰여질 때라 그런듯 하고 또 인공조림을 하기 전인듯 하다.
사진 우측의 큰 나무 두개도 기억이 난다.
앞에껀 감나문데 큰집앞에 있던거다.
저 나무서 지네가 내려와 감나무밑에 메어뒀던 개의 다리를 감았던 기억도 나고 , 저 나무를 벨때의 기억도 난다.
동네 으른들이 나무를 줄로 묶고는 상환네 큰집밭쪽으로 당기면서 밑둥을 베어냈었다.
아마도 나무가 쓰러지며 집을 덮칠까 그리했던듯 하다.
뒤쪽의 나무는 고염나무 였었다.
또 35년전 사진엔 어지러이 놓인 전깃줄도 없고 또 전봇대도 없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란 얘기다.
아마도 내고향에 전기가 들어온건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한두해 전인거 같다.
1978년 혹은 1979년
내 어릴적 기억속에도 등잔불 밑에서 속내속의 이를잡던 기억도 나고 , 또 전기 공사가 한창일때의 기억도 나는걸 봐서 대충은 맞을듯 싶다.
내 큰집은 동네에서 최초로 텔레비전을 놨었는데 저녁이면 마당까지 동네사람들이 모이곤 했었다.
사진속에서 보이는 초가로된 간이건물은 상환네 큰집앞에 있던건데 콩깍지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당시에 무엇때문에 콩깍지를 보관했었는진 모르겠다.
땔감으로 썼었나?
그러고보니 상환네 큰집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여기가 윤만네집이 있던 자리다.
아마도 윤만이가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나랑 학교를 같이 다녔을 거다.
윤만네집의 윤곽도 아직 기억에 남는다.
윤만이 형이 재만이형 , 작은누나가 은주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큰누나도 있었다.
이젠 웃말로 가보자.
예전엔 마을이 이쪽에 있었단다.
때문에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윗말로 , 윗말이 음이변해 웃말로 변했을 거다.
웃말을 오르다 돌아보는 머그네미.
멱툼벙.
우리가 멱감고 놀던 곳.
지금은 그나마 바위가 굴러떨어져 저 모양이 되었지만 예전엔 그래도 꼬맹이들 허리까진 찰정도의 툼벙이었다.
웃말에 들어서고 있는 전원주택.
덕곡리 최초의 전원주택 일거다.
수년전부터 인근의 마을들엔 많은 전원주택들이 들어선걸로 안다.
근데 유독 덕곡리만 예외였다.
난 그 이유를 두가지로 본다.
첫째, 타동네에 비해 경치가 그다지 좋질 못하다.
산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 골또한 그다지 깊지도 않다.
때문에 물도 맑지가 못하고 , 경관도 그리 수려하지가 못하다.
둘째는, 아마도 이동네 분들이 좀 배타적이지 않나 싶다.
다른말로 텃세라고 하는거........
교회나 암자 혹은 성당하나 없는것도 같은 경우가 아닌가 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없는 동네는 없던데.........
동네가 원체 작고 주민이 적어 들어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 치자면 다른 동네도 사정은 마찬가지 일거다.
암튼 그렇다는 얘기다.
유심히 보자니 타동네와 비교되는 점인거 같아서.........
어쨌든 때문에 나는 좋다.
범바위다.
생긴게 범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일수도 있고 , 혹은 저 바위위에 새겨진 발자국 형상에서 유래된 이름일수도 있다.
저 바위위엔 커다란 동물의 형상을 한 발자국이 있는데 우린 어릴적부터 그게 범의 발자국이라 들어왔다.
아주 옛날에 이 바위의 반대편의 굴앞에서 범이 펄쩍뛰어 이 바위위에 안착을 했단다.
그때 저 바위위에 범의 발자국이 생겼단다.
또한 아주 옛날에는 바위가 물렁물렁 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우린 그말을 그대로 믿었었다.
그 범의 발자국을 확인키 위해 범바위에 올라 한참을 뒤적여 보지만 저 넝쿨에 가려 그 형상을 확인치는 못했다.
아쉬웠다.
암튼 저 범바위는 우리가 멱감고 나면 옷을 갈아입던 탈의실겸 휴게실로 쓰이던 곳이었다.
저 맞은편의 바윗밑쪽에 있는 굴이 범의 굴이고 , 범이 펄쩍 뛰었다는 곳이 저 굴 앞이다.
가봤다.
굴이라기 보단 그냥 홈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우리 어릴적엔 이굴에다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저 예산군 어딘가에서 나온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범굴앞에서 바라보는 웃말 모습.
부엉산(빨간점)과 큰고개(연두색) , 강당 , 모세골 , 원서밥골이 훤히 뵌다.
큰고개는 탑곡리 소릿절로 넘던 고개다.
저곳이 대장터골 이다.
대장터골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도 알길은 없고 다만 세가지 정도로 추측만 해본다.
우선 애장터골의 음이 변했을수 있다.
두번째는 대장간이 있었던 데서 유래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허나 저런곳에 대장간이 있었을리는 만무해 뵈고.........
세번째는 어느 무리의 우두머리(대장)가 터를 잡고 있던데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곳에 터를 잡은 무리라면 아마도 산적의 무리일 확률이 높겠다.
허나 세가지 모두 내 추측일뿐 정확한 유래에 대해선 아리송 하기만 하고..........
더 올라본다.
왼쪽의 갈대숲 앞쪽이 예전에 영만이형네 집이 있던 곳이다.
나 어릴적만 해도 웃말에 세채의 집이 남아 있었다.
여기 영만이형네 , 그리고 강당 앞쪽으로 상환네와 배식이 형네.
저곳이 강당 이다.
강당도 어서온 명칭인지 모르겠다.
저 사진의 좌측 끄트머리쯤이 상환네집과 배식이형네 집이 있던 곳이다.
4촌형께 들으니 저 강당의 큰 바위가 있는곳 주변이 예전에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란다.
때문에 저곳의 나무는 누구도 해가는 이가 없었댄다.
내가 얼핏 듣기로는 산신제는 부엉산 중턱의 바위밑에서 지냈다고 들었었는데 아마도 내가 잘못 알았었나 보다.
아니면 두곳서 다 지냈을수도 있고.........
4촌형 말에 의하면 윗뜸의 산신제는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면서 지냈는데 어느핸가 **아저씨 차례때 건너뛰면서 흐지부지 되다가 없어졋다고 한다.
저곳은 모세골 이다.
역시나 모르겠다.
추측은 두가지로 생각이 드는데 , 우선 모래골의 음이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모래가 많아 모래골로 불리다가 음이변해 모세골로........
두번째는 모세골 할때 세자가 가늘세(細)로 보고 골의 모양이 가늘고 모가 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허나 골의 생김새로 봐서 이것도 그닥 성에 차지 않는다.
내 동생이 그러는데 저길 오동나무골 이라 한단다.
다만 나는 첨듣는 소리다.
웃말 계곡의 소.
물이 참 맑다.
소 한켠에 나뒹굴고 있는 아릉따릉.
곡식을 탈곡할때 쓰던건데 공식명칭은 아마도 호롱기 일거다.
근데 우린 저 기계를 아릉따릉이라 불렀다.
저 기계가 돌아갈때 그런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경운기를 딸딸이라 부른거나 마찬가지 다.
저긴 턱골 이다.
턱골인지 터골인지 텃골인지 분명치 않지만 보통 턱골이라 발음했다.
저골도 무지하게 깊은 골이다.
예전엔 저골에 으름따러도 많이 들었었고 , 정처비 잡으러도 많이 들던 골이다.
보기는 저래뵈도 저골 안쪽엔 손바닥 만한 논도 제법 있었고 , 큰밭도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넝쿨이 우거져 들기도 쉽지 않을거다.
턱골이란 저 골짜기를 통털어 일컫는 말이고 저 골 안쪽엔 붉은바위골 , 나무꾀골 , 참나무골 , 웃말골등의 골짜기로 더 세분화 할수 있다.
저쪽은 원서밥골.
이골도 제법 넓은 골짜긴데 도대체가 저명칭은 어떻게 해서 생긴건지 모르겠다.
다만 유일하게 들은 대로 '원서가 밥을 먹은 골짜기 라서' 라는 말을 그대로 믿을수도 없고.........
아마도 누군가 우스갯 소리로 한 얘기가 여지껏 전해지는 모양이다.
남청문날 이다.
큰아버지께 왜 남청문날 이냐고 여쭸더니 돌아오는 대답.
"남청문날이 그냥 남청문날이지 뭐여"
원서밥골도 마찬가지 대답이 돌아왔다.
하여 더 여쭤보지 않았다.
답이 보여서.........
다만 내 동생이 아버지께 들은 얘기로는 남첨지의 묘가 있던 날맹이라 '남첨지묫날'로 불리다가 음이 변한거란다.
그럴듯 하다.
남청문날 앞에서 내려보는 웃말 전경.
마 씨.
예정에 없이 남청문날을 오른다.
산앞에 서니 산이 땡긴다.
그냥 무작정 든다.
눈참 곱다.
그리고 맑다.
얼굴에 대고 문질러 본다.
션하니 좋다.
천연 파라솔.
숲 사이로 뵈는 금계산.
남청문날서 내려보는 눈덮힌 숲.
눈꽃.
준비없던 산행이라 발도 젖고 , 머리위로도 눈을 흠뻑 뒤집어 쓴다.
그래도 좋다.
남쪽으로 하늘이 열린다.
왼쪽게 나발봉(빨간점) 이다.
마곡사 바로 뒷쪽의 산이다.
우측건 옥녀봉(연두색) 이다.
만천리 뒷산이고 , 화흥리 뒷산이다.
땡겨본 나발봉과 옥녀봉.
여기까지 댕겨간이가 다있다.
어딜 댕겨 가신걸까?
금북정맥을 타시다가 길을 잃으셨을까?
금북정맥을 만났다.
해발 400m 봉이다.
이쪽으로 얼마안가 천방산이 나온다.
이쪽은 걱정봉 방향.
여지없이 이봉에도 산명이 붙었다.
안타깝다.
부엉산은 여기가 아닌데.......
금북정맥 우측으로 멀리 예산쪽 마을이 보인다.
아마도 당거리 일거다.
그 반대편인 금북정맥 좌측으로 보이는 저곳은 덕곡리 구당골.
동대말 꼭대기다.
여기서 좌측 능선을 타면 동대말로 바로 내려설수 있다.
숲사이로 뵈는 내고향 덕곡리 전경.
땡겨본거.
내고향집도 뵌다.
지금쯤 내 사랑하는 사람은 저곳서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을거다.
반면 난 이렇게 팔자좋게 산책질이나 하고 있고.........
각도를 약간 바꿔 다시 터지는 내고향 전경.
이번엔 멀리 법화산이 선명이 들어온다.
다시 땡겨본 모습.
좀있다 저쪽으로 털레털레 내려서게 될거다.
정동쪽으로 뵈는 태화산(빨간점)
그 앞쪽으로가 검단리 불당골.
내가 걸어온길을 뒤돌아 본다.
천방산(빨간거)이 뵌다.
어느덧 그렇게 오지재에 다다랐다.
여기서 강한 충동을 느꼈다.
예산쪽으로 내려서 마을구경이나 하고올까 하는 충동.
허나 뿌리쳤다.
명절날 오랜만에 형제들과 함께해야할 시간에 혼자만 좋자고 산을 헤집고 다닌다는건 도리상 아닌거 같았다.
오지재에 설치된 이정표.
이쪽이 예산쪽 당거리로 내려서는 길이다.
어릴적에 두어차례 걸었던 길이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머지않은 시점에 여길 내려서게 될거 같다.
정확히 2년전에 걸어뒀던 표지기.
2년전에도 설전날 이었는데........
암튼 고생이 많다.
그리고 고맙다.
역시나 2년전 금북정맥 종주 기념으로 걸어뒀던 팻말.
오지재서 내고향쪽으로 내려서자니 이렇게 함몰된 지대가 몇군데 나온다.
뭔지 알거같다.
예전에 이곳에 곱돌을 캐던 광산이 있었고 이쯤에 광구가 몇개 있었다.
그 광구가 무너진 모양이다.
이 무너진 광구를 보자니 또 떠오르는 사건 하나가 있다.
예전에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때쯤 될거다.
우리형을 포함한 또래 몇명이서 저 광구속이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때문에 형들 몇이서 저 광구속 탐험을 갔더랜다.
어른들께 말하지 말라고 동네 꼬마녀석들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후에.........
근데 어른들이 보기에 종일동안 보여야할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게 이상했던지 꼬마녀석들을 추궁을 했더랜다.
그리곤 곧 밝혀진 진실.
그건 곧 경악 이었다.
폐광된지 수십년이 되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 광구속을 아이들이 들어갔댄다.
그중엔 내새끼도 있댄다.
내가 당시의 부모님 입장이었더래도 정신줄을 놓을 일이다.
다행히 형들은 모두 무사 귀환했다.
아마도 하늘의 도움이 있었을 게다.
그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맞다 이곳에 집이 있었다.
그동안 여길 수차례 지나 댕겼었는데 왜 이걸 이제서야 봤을까?
흔히 '광주'라고 불리던 분이 살던 집이었은데 그분 함자가 광주인지 , 아니면 광산의 주인이라 광주라 불렸던건진 정확히 모르겠다.
나중엔 그분도 도랑골 병*네집 인근으로 이사를 가셨다.
지금은 세상에 안계시지만...........
새암터로 추정되는 곳.
오지재를 내려서 도랑골을 내려보고........
뒤로 뵈는산은 금계산.
돌아본 오지재.
저앞에 오목한 곳이다.
도깨비 툼벙이라 불리는 곳이다.
예전에 의*이형 아버지께서 이곳서 도깨비에게 홀려 몇일간을 산속을 헤멨던 적이 있단다.
요염한 자세로 비스듬하게 뿌리를 내린 괴목.
누가 심은건가 왠 돼지감자가 이리 많냐?
도랑골에 내려섰다.
걱정봉(빨간점)이 내려본다.
여까지 와서 저길 올라보지 못한게 조금은 걸린다.
다음에 보자.
다시 내고향집 앞에 복귀하여 뒤돌아본 모습이다.
저 뒷쪽에 눈덮힌 산능선을 우에서 좌로 지나쳐 갔다.
요기부턴 설날 당일날 찍은거다.
동대말에 올라 내려보는 내고향 머그네미 마을 이다.
저 앞쪽의 뾰족봉 밑으로 뵈는곳은 구당골 이다.
내 살점놈들은 나무때기 하나씩 들고 칼싸움을 하고..........
난 녀석들 그런 모습을 보며 수십년전 내 어릴적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는다.
도대체 세월은 어느새 이렇게 흐른거며 , 그때의 그분들은 다들 어디로 가신건지..........
경인년 새해를 맞아 바라노니 내 소중한 이들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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