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의 두번째 해가 떠오른 날이다.
오늘은 내고향 구석구석의 지명과 관련하여 정리해 보고저 한다.
덕곡리 입구께서 보는 서낭댕이 다.
언젠가도 언급을 했듯 아마도 성황당 혹은 서낭당의 음이 변하여 생긴 걸꺼다.
보다시피 저곳엔 느티나무 몇그루가 무리지어 서있고 , 한쪽엔 돌무더기의 흔적도 보인다.
나 어릴적엔 저곳에 두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아마도 도로를 새로내고 포장을 하면서 없앤 모양이다.
그 바윗돌 뒷편으론 약수가 나던 새암도 있어 목을 축이고 땀을 식히며 쉬어가기엔 딱좋은 곳이기도 했다.
내가 국민학교를 댕길땐 저 느티나무 구멍속에 올빼미가 둥지를 틀기도 했었고 ,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그 올빼미의 알과 새끼를 거내 가지고 놀던 기억도 난다.
그러고 보니 나어릴적 심심찮게 뵈던 부엉이나 올빼미 살갖이 같은 동물들은 아마도 우리동네선 멸종된 모양이다.
본지 수십년은 된듯하다.
왼편의 장승뒤에 서있는 나무는 참나무 혹은 상수리 나문데 저곳에선 간혹가다 꽉지벌레를 잡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곳엔 간혹가다 금줄이 쳐지곤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당골에서 산신제를 지내곤 걸어뒀던 거라고 들었다.
아버지께 들은 얘기론 산신제는 윗뜸과 아랫뜸이 따로 지냈는데 윗뜸의 산신제는 예전에 중단됐고 , 아랫뜸은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실 당시까지도 지내고 있었다고 하셨다.
그 아랫뜸의 산신제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진상의 왼쪽 돌무더기 뒷편은 예전에 행여집이 있던 자리고 , 서낭댕이 넘어 왼편엔 주막거리가 있었다.
여기가 행여집이 있던 자리다.
요새야 다 1회용 꽃상여를 쓰곤 현장서 소각해 버리지만 예전엔 이렇듯 동네 한쪽에 행여를 보관하곤 상이나면 꺼내쓰곤 했었다.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 였겠지만 이 행여집 앞을 지나치자면 괜히 무섭고 서늘해지는건 당연지사 일거다.
특히나 이곳의 행여집은 마을의 입구에 있는데다 길과 근접하여 어린 우리들에겐 그 무서움이 더했던거 같다.
나완 아주 각별한 사람하나가 어릴적 이곳서 귀신을 봤댄다.
일반적인 귀신의 형태라 하면 하얀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에선 붉은피를 흘리는 그런 처녀귀신이 대부분 일게다.
허나 나완 각별한 사람이 봤다는 귀신의 형태는 좀 독특하다.
얼굴과 몸은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띄었다 하고 특히나 얼굴이 삼각형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댄다.
거기다 기억은 안나지만 무슨 말까지 뇌까리다가 땅속으로 꺼져 사라져 버렸댄다.
내 듣긴 얼토당토 않은 소린거 같지만 본인의 말로는 그때 그 귀신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속에 남아 있으며 , 특히나 당시에 같이 목격을 했던 친구역시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본인과 똑깥이 기억을 하고 있다니 믿기도 뭣하고 안믿기도 뭣하다.
어쨌든 나완 각별한 사람이 귀신을 봤다는 장소가 저위 첫번째 사진의 파란팻말 뒷편이다.
서낭댕이를 지나쳐 대리골쪽을 바라본다.
대리골 역시 예전에 한차례 언급이 있었는데 공주시 홈피에서 설명하는 유래대로 라면 다래나무가 많아 다랫골로 불리다가 음이변해 대리골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전혀 성에 안차는 설명이긴 하지만 별다르게 떠오르는 바가 없으니 뭐라 대꾸는 못하겠다.
나중에 기회되면 더 뒤져보고 또 으른들께 여쭤서 알아봐야 되겠다.
대리골 뒷편으로 구름에 가린산이 걱정봉 이다.
걱정봉의 유래에 대해서도 수차례 언급이 있었다.
여기서 또 언급하긴 싫고 예전꺼 잠시 옮겨본다.
예전에 금계산에 홍길동과 그누이 그리고 홍길동의 어머니가 살았다 한다.
홍길동은 물론 그누이도 영웅적 기질을 갖고 있어 세상에는 두명의 영웅이 있을수 없다하여 홍길동과 그 누이는 목숨을 건 내기를 하게 되는데.......
그 내기인 즉슨 , 홍길동은 쇠신을 신고 소를 몰아 한양을 다녀 오고 , 홍길동의 누이는 홍길동이 돌아오기 전까지 금계산 정상에 성을 쌓는 내기였다 한다.
이에 목숨을 건 내기는 시작되고 홍길동의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이 더 소중하였던지 금계산 서쪽의 봉우리에 올라 한양쪽을 바라보며 아들을 걱정하였다 한다.
어느덧 세월은 가고 홍길동의 누이의 성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도 홍길동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홍길동의 어머니는 쇠솥에 펄펄끓는 팥죽을 끓여 딸에게 먹이니 홍길동의 누이는 뜨거운 팥죽에 입천장이 데어 죽었고 결국은 내기에서 홍길동이 이겼다 한다.
어떠냐?
조금씩 내용이 다를수도 있겠지만 어릴때부터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니냐?
이 설화에서 등장하는 금계산 서쪽의 봉우리는 홍길동의 어머니가 아들을 걱정하며 올랐다하여 걱정봉이라 하는데 덕곡리와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또한 홍길동의 누이가 쌓았다던 성은 먼저번 금계산의 이모저모편에도 소개가 된적이 있다.
설화 한가지 더보자.
어느날 홍길동이 금계산 정상서 걱정봉을 향해 활을 쏘고는 화살이 빠른지 자신의 애마가 빠른지 시험을 하였다 한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고 이내 말을 달려 걱정봉 정상에 도달한 홍길동은 한참을 기다려도 화살이 날아오지 않자 그죄를 물어 자신의 애마의 목을 베었다 한다.
그때 화살이 날아와 걱정봉 정상의 나무에 꽂히니 그제서야 홍길동이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도 기억나냐?
위에 두가지는 걱정봉 동쪽 그러니까 유구쪽에 내려오는 설화고 , 그반대편인 예산군 대술면 쪽에도 설화가 내려오는데 그쪽 설화는 간단하다.
마을의 장정들이 산에 나무를 하러가선 도박만 일삼자 마을의 아낙네들이 걱정하며 바라보던 산이라 걱정봉 이라 한다.
마을회관 앞에서 바라보는 구당골쪽 모습이다.
당골이란 산제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걸로 아는데 앞에 구자가 붙은 이유에 대해선 모르겠다.
암튼 공주시청 홈피에 의하면 이곳이 여말선초때 이성계에 반대하던 선비들이 초근목피 했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골 뒷편으로 뵈는산이 공주시청 홈피엔 고대촌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고씨네 묘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이곳 살던 종*는 저곳을 '고대춘' 으로 발음하는데 직접가보면 괴목이 우거지고 산제당까지 있어 음산한 기분이 드는 곳이란다.
몇해전엔 추계리 사람이 저산 인근서 산삼도 캐갔단다.
공주시청 홈피에 의하면 저기 어딘가에 장자골이란 골짜기가 있다는데 그곳에 내려온다는 설화 하나를 옮겨본다.
장자골 [마을]
[위치] 구당골의 서쪽 골짜기.
[유래] 장자골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을 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돈이나 재물을 베푸는 데는 인색해서 걸인이나 중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돈푼이나
있어서 큰 소리를 치지만 마을에서는 인심을 잃고 있었다. 하루는 허름한 중이 집에 찾아와서 목탁을 치며 시주를 원했는데 사랑방에서 담뱃대를 탁탁 털던 장
자는 미다지 문을 확 열고는 버선발로 뛰어 나와선 중의 바랑을 번쩍 벗기더니 마당에 팽개치는 것이었다. 마당에는 바랑속에 들었던 곳긱이 와르르 솓아졌다.
그리고선 돌아서는데 중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말하기를 "조금만 노력하면 만석꾼이 될텐데........ 그걸 가르쳐 드리려고 왔는데......." 하고 입맛을 쯧쯧 다시
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이말을 들은 장자는 그 말이 솔깃해서 "그래요. 허....... 참 내가 큰 실수를 했구만. 어디 어떻게 하면 내가 만석꾼이 되겠
소" 하고 웃으면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중도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덕곡리 장승터에 있는 바위를 깨서 두 조각으로 만들면 당장 만석꾼이 되겠소이다." 하고선
앉아 곡식을 쓸어서 바랑에 담더니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중이 돌아가자 장자는 당장에 석수쟁이를 불렀고 그리고선 그들에게 이 밤이 새도록 바위를 두
조각으로 깨면 보수를 배로 주겠다고 하므로 석수쟁이 몇 사람은 열심히 돌을 깨기 시작하여 새벽까지 두 조각을 만들어 놓았다. 장자는 이제 만석꾼이 되었다
고 기뻐서 석수쟁이에게 돈을 듬뿍 줘서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날부터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다음해는 곡식에 병이 생겨서 모두 이삭을 맺지 못했다.
그런 일이 연거푸 일어나 3년내에 그 장자는 완전히 거지가 되었다. 마을에서 재물이 나가지 못하게 바위가 막고 있어서 그나마 장자로 살았는데, 그 바위를 깨
버리자 재물이 새나가는 바람에 인색한 장자는 거지가 된 것이다.
난 여지껏 구당골의 서쪽 골짜기에 장자골이란 골짜기가 있는줄도 몰랐고 , 또 이런 전설이 내려온단 얘긴 들어보도 못했다. 종대야! 넌 들어본적 있냐? 어쨌든
이 설화속에 등장하는 덕곡리의 장승터라 함은 서낭댕이를 이르는 말인거 같고 , 석수쟁이가 밤을 세워 두조각을 내었다는 바위는 우리 어릴때만 해도 가끔식
올라서 쉬어가던 그 바위 두개를 이른는 말인거 같다. 지금보니 그 두개의 바위는 아예 사라지고 없더라. 다만 그 두개의 바위대신 이젠 커다란 두개의 석장승
이 마을에서 재물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앞으로 덕곡리는 큰 부자 마을이 될거 같다.
또한 구당골엔 커다란 묘가 한기 있는데 그동안은 막연히 '어떤 장군의 무덤 이라더라' 혹은 큰묘 옆의 작은 무덤을 두고 '그 장군이 타고 다니던 말의 무덤 이라더라'
라는 정도로만 얼핏 들었던거 같다.
헌데 아무래도 그 묘가 공주시청 홈피에서 설명하고 있는 윤봉오란 분의 묘소가 아닐까 추측만 해본다.
자세한건 언제고 직접 찾아 비문을 확인하던가 아니면 동네 으른들께 여쭤서 알아볼 참이고 일단 공주시청 홈피의 윤봉오란 분에 대해서 옮겨본다.
윤봉오묘(尹鳳五墓)〔묘〕
[유래] 그의 자는 季章이고, 호는 石門이며, 시호는 肅簡이다. 1746년(英祖 22年)에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弼普, 副修撰, 校理 등을 거쳐 홍천 현감으로 나 갔다가 1759년 동지의금부사, 대사헌에 올랐다. 서기 1763년 特進官, 判敦寧府事를 겸하고 1768년 사직을 거쳐 다음해 우참찬으로 者老所에 들어간
[위치] 덕곡리.
문신이다.
우리가 흔히 당골이라 부르는 곳이다.
혹은 양짓말 이라고도 부른다.
분명 당골과 양짓말은 별도의 지명일텐데 나도 정확히 구분짓질 못하겠다.
역시나 추후에 기회봐서 동네 으른들께 확인해서 기록해 두고자 한다.
이젠 흔히 대리골 당골 구당골이라 불리우는 아랫뜸을 떠나 윗뜸으로 오르는 길이다.
윗뜸은 크게 머그네미와 도랑골로 나뉜다.
윗뜸을 오르기 위해서는 위 사진상의 서당골 앞을 지나쳐야만 한다.
서당골은 아마도 예전에 서당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일게다.
어쨌든 이곳도 밤에 혼자 걷기엔 꽤 무서운 곳중 한곳이다.
길 자체가 산과 근접할뿐 아니라 서당골은 예전에 애장터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채 백일을 넘기기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단다.
그때마다 죽은아이를 이골짝에다 묻었단다.
듣기로는 애장은 봉분도 없는 돌무더기의 형태라 들었다.
동네 으르신 중에 이곳서 귀신을 봤다는 분도 계시다.
남*이 아버지께서 약주 드시고 느즈막히 오시다가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귀신을 보고는 술이 확깼대나 어쨌대나 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아마도 어린 나를 놀리기 위해 하신 말씀일 텐데 여태 내 머릿속에 이렇듯 남아 있는걸 보면 당시에 난 저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을 거고 또 나름대론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었나 보다.
암튼 남*이 아버지께서 보셨다는 귀신은 전형적인 그 처녀귀신의 형상이었단다.
어쨌든 난 어쩌다 막차타고 혼자서 이구간을 지나칠 일이 있을땐 앞뒤 보지않고 무조건 뛰었었다.
고개를 돌려 서당골 반대쪽을 보면 저 산아랫쪽에 허름한 건물 하나가 보일거다.
또 행여집 이다.
윗뜸서 사용하던 행여집 인데 지금은 사용치 않는다.
이렇듯 서당골 구간은 산과 근접한것도 모자라 한쪽은 애장터 , 또 다른 한쪽은 행여집이 자리잡고 있다.
야밤에 이구간을 혼자 걸을때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하게 서는건 당연한거 아닐까?
이젠 내고향 머그네미 마을이 완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여러차례 언급을 했듯이 요 앞쪽 일대를 우린 혼내깔 이라 부른다.
내깔이란 냇물의 고어 혹은 사투리 일거고 따라서 혼내깔 이란 내깔이 합쳐진단 의미의 합내깔이 홉내깔을 거쳐 혼내깔로 음이 변할걸로 생각이 된다.
다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우리 어릴적엔 꺼먹고무신에 쳇박 하나씩 들고 이 혼내깔서 고기도 많이 잡곤 했었다.
그때 많이 잡히던 물고기들이 미꾸라지 , 중태미 , 하늘고기 , 밤고기 등이 였고 , 비록 물고기는 아니지만 보리방개도 많이 잡혔었다.
교과서 등에서 흔히 뵈던 방개는 우린 쌀방개라 불렀는데 그건 추동 개울에나 나가야 잡을수 있었다.
또한 겨울이면 정처비도 많이 잡았었고 아주 가끔이긴 했지만 뱀장어도 있었고 , 메기도 있었고 , 자라도 있었고 또 도랑골 우리논 밑에선 참게를 잡았던 기억도 난다.
혼내깔 뒷편으로 보이는 마을이 내고향집도 있는 머그네미 마을이다.
머그네미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다뤘었다.
예전에는 오동나무를 머귀나무라 불렀고 그 머귀나무의 음이 변해 머그네미가 되었다는게 정설 이다.
저 말의 아귀가 맞기 위해서는 일단 머그네미 마을에 오동나무가 좀 있어야 된다.
허나 몇그루 안된다.
대충 생각해 봐도 두*네 개울가에 한 둬그루 또 정*이네 개울가에 또 한 둬그루 그리고 큰집 개울가에 또 한 둬그루 그리고 턱골 입구께 한 너댓그루.
내 머릿속엔 이정도다.
적어도 오동나무가 많아 지명으로 고착화될 정도라면 저정도로는 많이 부족해 뵌다.
하여 내가 생각하기엔 저 머그네미 할때 '네미'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어뵌다.
전국엔 저 네미라는 단어가 붙은 지명이 많은걸로 안다.
내가 산줄기 이어타기를 하며 만난 수레네미와 무네미란 지명도 그중에 하나다.
수레네미는 수레가 넘나들던 고개를 이르는 지명이고 , 무네미는 물네미의 ㄹ이 탈락 된걸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무네미는 물이 넘나들던 고개를 이르는 말인거 같긴한데 ,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보다는 물을 가른다는 뜻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우리동네의 배티네미는 배티의 너머에 있는 곳이라 배티네미라 불려졌다.
어쨋든 저 네미란 단어가 붙은 지명들 사이엔 뭔가 유사성이 있어뵈긴 하는데 확연히 눈에 들오지 않는다.
'넘다'라는 동사 그리고 '너머'라는 명사.
저 두 단어와 관련된 뭔가가...........
내고향집 앞에서 올려다 보는 도랑골로 오르는 길이다.
도랑골.
솔직히 도저히 모르겠다.
왜 도랑골 일까?
정말 도랑치고 가재 잡다 할때 그 도랑일까?
오늘은 맘먹고 동네 으르신 누군가 에게라도 여쭤봤으면 싶은데 오늘따라 한분도 안계신다.
나중에라도 꼭 한번은 여쭤보고 확인해 볼거다.
저 도랑골로 오르는 좌측의 산이 안산인데 안산은 앞산의 음이 변할걸꺼다.
전국에도 안산이라 이름 붙여진 수많은 산들이 있는걸로 안다.
암튼 저기서도 귀신을 봤다는 분이 계시다.
역시나 나완 각별한 분인데 저 윗쪽의 그분은 아니다.
암튼 여기서 봤다는 귀신도 예의 그 처녀귀신 이었다.
동네 고사티다.
저기 애들이 뛰고 있는 바로 윗쪽이 우리가 많이 놀던 곳이다.
저 좁은곳서 공도 많이 찼었다.
말타기도 했었고 , 찌동박치기도 했었고 , 나이먹기도 했었고 , 밤이면 숨기장난도 했었다.
고사티 뒷편으로 보이는 산이 동대말 이란 곳이다.
동대말 이란 지명역시 어디서 온건지 모르겠다.
암튼 저 동네말은 이동네 출신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리운 곳으로 기억이 될게다.
나도 저곳서 불알친구들과 뛰어놀던 기억이 선하고 저 언덕배기에 모여 연을 날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저 동대말 꼭대기엔 모이마당이란 넓은 마당이 있어 거기서도 많이 놀곤 했었다.
모이마당은 내가 복권에 맞는다면 집짓고 살고픈 제 일순위로 찍어논 곳이다.
복권이 안맞는 다면 그냥 황당무개한 꿈일 뿐이고........
기다려 보자.
난 복권을 좋아한다.
복권이란게 비록 확률이 낮긴 하지만 공평해서 좋다.
가진자 에게나 못가진자 에게나 , 배운자 에게나 못배운자 에게나 또 힘있는자 에게나 힘없는자 에게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낮은 확률만 갖게하는 복권.
세상에 이 복권만큼 공평한 것도 드물껄?
내고향집 앞에서 동쪽을 바라본다.
우리가 흔히 가찬지골 이라 부르던 골짜기 입구가 보인다.
아버지께 들으니 발음상 '가찬지골' 이라 들릴뿐이지 실제론 '박첨지골'이 맞댄다.
저 골짜기에 박첨지란 사람의 묘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고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실 시점 얼마전 까지만 해도 박씨성을 가진이들이 저 골짜기에 들어 금초도 하고 제도 지냈다고 하셨다.
어쨌든 저 골짜기는 겨울마다 토끼 올게미를 놓곤 거의 매일을 보러 댕기던 골짜기 였다.
아마도 지금은 우거져서 들기도 쉽지 않을거다.
저기 뵈는 저집이 귀*이네 집인데 우린 저곳을 '저건너'라 불렀다.
저쪽 개울 건너에 있는 집이라 그렇게 불린거다.
"니네 엄마 어디 가셨니?" 하면
"저건너에 마실 가셨쓔" 하듯 이렇게.......
우리밭이 있고 내아버지께서 잠들어 계신 저골짜기는 집너머 다.
귀*이네 집의 너머에 있다해서 집너머라 불리건다.
지명이란 것도 참 단순하고 쉽게 생기는거 같다.
내고향집 앞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뵈는 골짜기다.
용골 이다.
이곳도 왜 용골인지 전혀 알길이 없다.
다만 추측컨데 골짜기가 좁고 깊어 그 형태가 용과 같다하여 그리 불리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들어보면 저 골도 엄청 깊다.
잠시 동대말에 올라본다.
제일먼저 저앞에 납골묘 공사현장이 눈에 들온다.
그새 공사범위가 많이 넓어졌다.
좀 알아봤다.
알아보니 이건 아닌거 같다.
일단 지켜만 볼란다.
저 납골묘 공사현장 뒷편 역시 일전에 언급이 됐던 곳이다.
숫골 , 수골 혹은 숯골중 어느게 맞는진 정확힌 모르겠지만 내보긴 숯골이 맞는거 같다.
아마도 예전에 저곳서 숯을 굽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저골짜기 끝에가면 숯을 굽고도 남을 넓은터가 있다.
동대말서 바라보는 도랑골 이다.
저 마을 일대를 통털어 도랑골이라 부르긴 하지만 실제로는 저곳에도 많은 지명들이 존재한다.
삼마골 , 오지재 , 용가마골 , 감나무골 , 닷냥골 등등등.........
좀 더 땡겨봤다.
저 마을 뒷편으로 흘러가는 산줄기가 금북정맥의 주능선 이다.
저구간을 지나는 정맥꾼들이 간혹가다 이런 표현들을 한다.
'능선이 칼날같다' 혹은 '능선이 자연성곽을 연상케 한다'
어릴적 아버지께 들은 얘긴데 저 능선너머 예산쪽에 세력이 대단했던 한산이씨 들이 살았더란다.
그 한산이씨네 머슴들이 흙을 지게로 져날러다 저 능선을 쌓았단다.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이 참인지 농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알아보니 실제로 저 능선너머에 한산이씨들이 정착을 해 산건 사실 이었다.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그 유명한 이남규 고택의 주인이 한산이씨 다.
이남규는 선조때 영의정을 지냈던 아계 이산해의 후손으로 항일독립 운동가 였단다.
이남규 고택도 꼭한번 찾아볼 참이다.
어쨌든 사진상의 빨간점을 찍어논 골짜기를 닷냥골 이라 부른다.
사실 저골짜기가 확실한지 정확친 않다.
기회되면 으른들께 확인해볼 일이다.
닷냥골 이란 지명은 예전에 억* 아부지 라던가? 아니면 상* 아부지 라던가? 암튼 누군가가 저곳에 산불을 냈는데 그 벌금으로 닷냥을 냈단다.
그리하여 그뒤로 닷냥골이라 불려지게 되었단다.
참 재밌는 지명이다.
닷냥골 좌측의 연두색 점을 찍어논 골짜기가 용가마골 이란 곳이다.
용가마골?
저기에 옹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나?
저기도 직접 가볼 참이다.
하다못해 옹기 파편이라도 있다면 내 추측이 맞을거다.
용가마골 좌측의 골짜기가 오지재다.
오지재는 예전에 인근의 주민들이 예산장을 가기위해 넘던 고갠데 저길 그대로 넘어가면 예산군 대술면 당거리가 나온다.
당거리 중에서도 소거리란 동네다.
오지재 아랫쪽엔 예전에 곱돌을 캐던 광산이 잇었는데 우리 어릴적만 해도 광구도 있었고 , 광물을 실어나르던 똘차도 있었고 , 똘차가 지나기 위한 레일도 있었다.
똘차는 돌차를 세게 발음해서 생긴 현상이 아닌가 한다.
이제 오지재는 예산장을 보기위해 넘나드는 인적은 끊겼다.
대신 많은 정맥꾼들이 찾고 있다.
혹여나 오지재란 지명이 사라질까 내가 예쁜 팻말도 걸어뒀다.
근데 오지재란 명칭은 또 어서 왔을까?
다섯개의 가지?
도랑골 쪽으로 올라본다.
아까 그 납골묘 공사현장 이다.
지켜보자.
정*형네 마밭 이다.
보아하니 마를 아예 캐지도 않었다.
몇년전 웰빙열풍이 불때에 비해 마값이 똥값이 되었댄다.
다들 경제가 어려워지니 건강문제는 후순위로 밀린 모양이다.
언론서 떠드는 대로 정말 경기가 살긴한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 일부 신문같지 않은 신문의 찬양가에 놀아나고 있는건 아닐까?
저기 뵈는 골짜기가 삼마골 이다.
공주시청 홈피엔 산막골 이라 설명하고 있다.
화전민들이 산막을 짓고 살았던 데서 유래한단다.
허나 이동네 원주민들은 분명 '삼마골' 이라 발음한다.
삼마골?
오늘 숙제 참 많이 생긴다.
도랑골 전경.
저기 빨간색 점을 찍어논 곳이 금북정맥상의 오지재다.
더 돌아보고 싶었는데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밥먹으러 가잔다.
가는길은 일부러 작은길로 가본다.
아까 시멘트 포장이 된 길말고 샛길로 통하던 이쪽을 작은길이라 불렀다.
이 개울 왼편의 풀숲은 원*네 밭이었고 , 개울 우측은 우리논 이었다.
허나 이젠 이렇게 주인을 잃고 잡풀만 우거져 있다.
그 옛날 대를 이어가며 고단한 삶을 살던 분들의 수많은 땀방울이 배여있을 땅인데.........
세월이 무심하고 , 생이 참 무상하다.
이곳에도 귀신 이야기가 있다.
채 20년이 안된 시절의 얘기니 귀신이야기 중엔 가장 최근의 얘긴듯 싶다.
내가 막 사회를 나왔을 때쯤 일거다.
정*형이 도랑골에 마실을 갔다가 야밤에 혼자 이길을 걷게 되었단다.
그때 이 작은길 밑쪽에 하얀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앉았다가 느닷없이 자신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더 랜다.
하여 '사람살려' ' 사람살려' 있는힘껏 소리를 질렀댄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인근의 주민들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정*형이 길가 넝쿨숲에 다리를 묻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더랜다.
눈은 약간 풀려 가지고.........
내가 직접 들은 얘긴 아니니 아마도 도중에 재미를 더해 첨가된 내용도 있을게다.
허나 참 재밌는 얘기다.
정*형이 약주가 과했던 모양이다.
조앞에 고추말뚝 위에 앉은새를 우린 무당새라 불렀었는데 정확한 명칭인가?
박새가 맞나?
벌통도 앙증맞게 자리를 잡았다.
큰아버지껀가 아니면 *현이 아버지 껀가?
땡겨보고........
엄마 모시고 유구로 밥먹으러 나왔다.
모듬구이.
음식도 정갈했고 고기맛도 좋았다.
서빙하는 아주머니께서 조금만 더 친절하셨다면 더 좋을뻔 했다.
오늘은 맘먹고 내고향 지명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했었는데 역시나 어렵다.
짧은시간 절반도 돌아보지 못했고 또 돌아본다 해도 딱히 알길도 없었다.
오늘따라 동네 으른들은 한분도 뵈질 않으시고........
암만해도 농한기라 동네 회관서 약주들 드시는 모양이다.
어차피 맘먹은거 더 돌아보고 더 알아보고 더 정리해 두려 한다.
아마도 한세대가 더 흐르고 나면 그나마도 알아보고 확인해볼 방법조차 완전히 사라지고 말거다.
이런때 아버지께서 계셨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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