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제?   2009년 6월 27일 흙날

누  구 랑?   나혼저

어      딜?   어물리-국사봉-사기소고개-덕재고개-삐티고개-공주고개-청라리 나발터 마을

도상거리?   11.9km(접근거리 , 탈출거리 몽땅 포함)

소요시간?   6시간 50분(접근시간 , 탈출시간 몽땅 포함)

비      용?   버스비 7800원 , 택시비 4000원 , 이것저것 600원

 

전월지맥은 금북정맥 덕고개-차령고개 구간의 국사봉에서 분기하여 동남 방향으로 흘러가는 산줄기로 길이는 약 30km에 이른다.

지맥능선의 대부분은 공주시와 연기군의 경계를 이루며 흘러가다 또다른 이름의 국사봉에 이르러 좌틀하여 완전히 연기군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그 끝은 금강과 미호천이 만나는 합수점에 몸을 묻는다.

지맥이 몸을 묻는 합수점 바로 직전에 맺는 원수산과 전월산 그리고 노적봉은 추후 행정중심복합 도시가 들어설 바로 그곳이다.

가신님이 그리워 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경수님께서 예전엔 이 산줄기를 국사단맥 이라 칭하셨더니 이번에 수체계도를 족보식으로 바꾸면서 주된산도 전월산으로 또 산줄기 분류도 단맥급에서 지맥급으로 격상을 시키신 모양이다.

 

들머리서 본 오늘 산행의 발자취.(하늘색 궤적)

 

이건 날머리서 본거.

 

태양이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흑성산을 바라보며 집을 나선다

이앞에 파헤치고 헤집어 놓은곳은 생활체육공원이 들어설 자리란다. 

 

요앞에 뵈는산이 말망산 이다.

천안여고 뒷산 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과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아직 올라보질 못했다.

 

저 버스정류장 간판의 '마틴의 거리'가 의미하는게 뭔지 갑자기 궁금해 진다. 

하여 돌아와 찾아봤다.

찾아보니 이곳도 우리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중 한곳 이었다.

6.25때 천안삼거리와 도리티고개 근방서 미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데 그때 미군의 지휘관 이름이 마틴대령 이었단다.

어쨌든 당시의 전투에서 마틴 대령을 포함하여 미군병사 500명중 325명이 전사 , 행방불명 혹은 적의 포로가 되었고 그 전투가 미군의 첫 패배로 기록된 전투 엿단다.

여하튼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는 계기가 됐다하니 우리역사에 있어 또 중요한 전투가 있던곳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때 전사한 마틴대령과 미군들을 기리는 뜻에서 천안삼거리 부터 도리티고개 까지 이르는 길을 마틴의거리로 지정했다 한다.

마틴대령과 같은분이 있어 이 나라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다시 찾은 정안 면소재지다. 

이곳서 어물리에 가기위해 또 한참을 기다린다.

버스편은 어찌 되는지 알아보지 못했고 면소재지에 딱 한대 있는 택시마저 천안에 손님 태우고 갔단다.

 

한참만에 택시를 타고 어물리에 들왔다.

이 마을 이름이 '할미당' 인가 보다. 

난 저 새로운 주소체계를 알리는 간판을 볼때마다 정말로 칭찬해 주고 싶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공식적인 이름은 단순히 '어물리' 였을거다.

'할미당'이니 '어무실'이니 하는 지명은 아마도 동네 촌로들 한테나 불려지고 있었을 거고........

그렇게 세월이 가고나면 언젠가는 '할미당'이란 지명은 사라지고 그렇게 이마을은 단순히 '어물리' 로만 남게 될거다.

또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건 현재의 마을이름 대부분이 일제가 행정구역을 병합한다면서 만들어낸 이름들인데 참으로 성의없이 만들어 졌다는 거다.

덕곡리를 예로 들어보자.

덕곡리에 존재하던 마을이 덕암과 당골이라는 마을 이었다.

덕암에 덕자와 당골할때 골자를 한자화 해서 곡으로 바꿔 붙였다.

이래서 생겨난 마을 이름이 덕곡리다.

때문에 덕암초등학교란 명칭도 저 덕암이란 마을에서 유래된거다.

저 덕암이란 마을명이 사라지고 없으니 덕암초등학교란 명칭이 덕곡리의 덕자와 문암할때 암자가 합쳐져서 생겨난 거라는 웃지못할 현상이 발생하는 거다.

좀 더보자.

탑곡리도 탑산의 탑자와 소곡의 곡자가 합쳐져서 생겨난 마을 이란다.

소곡은 소릿절을 이르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문금리는 어디 에도 나와 있지 않은데 아마도 문암할때 문자와 금계산 할때 금자가 합쳐진거 같다.

혹은 검단할때 검자가 금으로 읽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추계리도 어디에도 설명은 없다.

다만 추측컨데 추동할때 추자와 계봉할때 계자가 합쳐진게 아닌가 한다.

계봉이란 마을은 50000분의 1 지도를 보니 내기마을을 이르는거 같기도 하다.

이근방 뿐이 아니다

아마 모르긴해도 전국의 마을이름 대부분이 저딴식으로 만들어 졌을 게다.

이렇듯 우리는 일제가 저렇게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충 만들어낸 마을이름을 일백년 가까이 쓰고 있었던 거다.

이제라도 다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조상님들의 얼이 담긴 옛 지명들이 주소체계에 편입되게 되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현상인가 말이다.

 

다음은 공주시청 홈피서 발췌한 할미당고개의 유래다.

 

[위치] 어무실 북동쪽. 어무실에서 연기군 전동면 금사리 사기소로 넘어 가는 고개.

[유래] 할미당 고개는 예전에는 사기소 고개였다 한다. 사기그릇을 만들던 사기소가 있었기 때문에 사기소 고개라 하였다. 지금도 사기그릇 부스러기가 산재하여 있다. 사기고개란 이름이 세월이 흐르면서 와전되어 사구실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사구실고개가 할미당 고개로 된 것엔 쓰라린 사연이 있었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장이 있었던 시대라 전한다. 고개 아랫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자녀를 3남매 두었는데, 위로 아들 2과 막내딸이 있었다. 할머니는 큰 아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어머니를 모시기 싫은 아들과 며느리는 노모를 학대하더니 마침내는고려장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부모가 이야기하는 것을 잠자다 듣던 손자는 부모가미웠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알려주고는 함께 집을 나가자고 하였다. 할머니와 손자는 집을 몰래 빠져 나와 둘째 아들네 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 내외도 반가워하지 않고 학대를 했다. 젊어서 모은 재산을 모두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애지중지 키운 아들들에게 학대를 받느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막내딸을 찾기로 하였다. 저녁도 못먹은 채 막내딸을 찾아 떠났다. 막내딸은 사기소 고개 너머에 살고 있었다.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할머니는 인적 없는 산길을 달빛과 벗 삼아 간신히 고개 위에 올라오게되었다. 배고프다고 보채던 어린 손자는 자는지 등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고개 위에 오르니 배고프고 지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안은 채막내딸을 부르다 숨을 거두었다.그 후 그 고개는 산의 형체가 변하여 할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그 후 그 고개를 할미당고개로 전하여 오게 되었고,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고개 마루에는 서낭당이 생겼다. 오가는 사람마다 돌을 던져 할머니의 넋을 위로 하였으며 현재까지 산의 모양이 아기를 안고 있는 형체로 남아있으며 성황당도 형체가 남아 있다.

 

이렇듯 우리의 고유지명은 그냥 생겨난게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네 조상님들의 삶과 애환이 묻어나고 역사와 문화가 배어 있고 또 지형의 형태도 반영이 되어 있는 또다른 형태의 우리의 문화유산 인거다.

하마터면 우린 이걸 잃을뻔 했다.

 

어쩌다가 얘기가 옆으로 새선 한참을 갔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다.

 

벼 색깔이 유난히 검다. 

흑민가?

 

어물리 마을 뒷편으로 국사봉이 위엄있게 솟았다.

국사봉의 왼편으론 255봉 줄기를 , 오른쪽으론 전월지맥을 내뻗어 마을을 포근히 감사안고 있다.

 

국사봉 밑에 이르니 이런 저수지도 있다.

수질이야 말할것도 없겠다.

 

저수지 뚝방에서 어물리를 내려 본다.

 

저수지 주변으로 낚시꾼의 흔적이 없다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구먼......... 

 

급사면을 타느라 땀으로 멱을 감으며 국사봉 정상에 섰다.

이곳서 좌측 노란색쪽으로 뻗은 능선을 타면 전월지맥을 탈수 있고 , 우측 하늘색쪽으로 뻗는 능선을 타면 한일고등학교로 갈수 있다.

그리고 이 사진찍는곳 뒷편으론 금북정맥이 흘러간다.

국사봉 정상이 이리 허접해 뵈긴해도 그래도 이곳이 천안시와 공주시 그리고 연기군을 가르는 3개 시.군의 분기봉 이다.

공주시 입장에서 보자면 금북정맥은 이곳서부터 공주시에 접어들어 신풍면 봉갑리 416봉에서 청양군에 넘겨주기 전까지 약 45km를 공주시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공주시도 참 무심하다.

한남정맥 광교산 얘길 잠깐 하고 넘어가야 되겠다.

광교산은 수원시와 용인시의 접경지역에 있는 산이다.

작년에 내가 이곳을 지나칠때만해도  광교산의 정상에는 수원시에서 세운 정상석이 설치돼 있었다.

근데 그게 참 말이 많았다.

광교산의 정상은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선에서 용인시쪽으로 약 2~3m가량 치우쳐 있는데 왜 용인땅에 수원시에서 정상석을 세웠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근래 올라오는 산행기를 보면 광교산엔 용인시에서 세운 새로운 정상석이 서 있단다.

그리곤 용인시를 지나가는 한남정맥 전구간에 걸쳐 등산로를 정비하고 이정표를 정비했단 소식이다.

이렇듯 타시.군에선 정상석 하나를 놓고도 저리 신경전을 벌이는 실정이다.

말나온 김에 아산시 얘기도 잠간 하자.

산줄기 개념체계상 아산시는 참 복도 없는 자치단체다.

270km 금북정맥중 아산시를 통과하는 구간은 갈재근방서 봉수산에 이르는 7km가 채 안되는 구간이 전부이니 말이다.

근데 아산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산줄기 이론체계상 듣도보도 못한 아산기맥 이라는 산줄기를 개발하여 등로를 정비하고 시차원에서 홍보를 하고 있다.

그결과 많은 산꾼들이 찾고 있고............

 

상황이 이럴진데.........

공주시는 진짜 심하다 싶을정도로 무관심 하다.

금북정맥 45km를 가는동안 이정표하나 정상석 하나 볼수가 없으니 혹여 이 금북정맥의 존재를 알기나 하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있긴 하다.

쌍령산 봉수대 안내판하고 , 각흘고개 표지석 하고.........

어쨌든 이 45km 구간중 아산시와 접하는 구간과 예산군에 접하는 구간은 전부 선점을 당했으니 이제 남은 구간은 어느 시.군에서 먼저 찜을 할건지 한번 지켜 볼란다.

그리고 또하나 산과 관련하여 이 공주라는 시가 얼마나 복이 많은 시인고 하니..........

금북정맥뿐 아니라 저 금강 밑으로는 또 금남정맥도 공주시에 진입한다.

어디 그뿐인가?

계룡산이란 국립공원도 안고 있다.

여기서 다면 말도 안한다.

또 있다.

바로 십승지 코스다.

우성면 통천포 인근서 시작하여 신풍면 , 유구읍 , 사곡면을 돌아 다시 통천포 인근으로 떨어지는 약 90km에 이르는 산줄기다.

공주시에서 아무런 시설하나 설치하지 않았고 , 별다른 홍보하나 하지 않았음에도 지금도 간간히 이코스를 찾는 산꾼들이 있다.

하물며 등로를 정비하고 시차원의 홍보가 있다면 어떨까?

 

오늘 이상하게 자꾸 얘기가 옆길로 샌다.

그냥 국사봉 정상에 정상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게 얘기가 이만큼이나 새버렸다.

 

7개월 만에 다시보는 내 표지기다.

작년 11월에 먼저나온 내 살점놈과 같이와 걸어논 거다.

 

전월지맥의 선답자이신 신경수님의 표지기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길래 주워 걸어 둔다.

 

국사봉이후 전월지맥은 이리 고도를 급격히 낮춘다.

그리곤 이 산줄기가 다할때까지 그만큼의 고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다.

 

벌써 이 영지버섯이 나올 계절이 되어 가는구나.

영지버섯은 우선 저리 대궁만 올라온후 저 노란색부분이 펴지면서 갓이 생긴다.

 

지맥의 왼편으로 보이는 마을인데 아마도 연기군 전의면쪽 금사리가 아닌가 한다.

 

지맥의 우측인 이곳은 공주시 정안면 어물리고 멀리 희미하게 무성산이 뵌다.

사진 우측의 벌거벗은 산은 지난번 먼저나온 살점놈과 지나쳤던 255봉 이다.

 

사기소 고개다.

또 할미당고개 이기도 한 곳이다.

예전엔 저 고개 좌측의 금사리쪽 마을분들이 이 고개를 넘어 광정장을 보러 많이들 넘나 들었다 한다.

 

한참만에 보는 표지긴데 처음보는 표지기다.

춘천의 오상호님.

혹시 전월지맥 종주를 하셨나요? 

 

여기서 잠시 헤멨던 곳이다.

좌로가야 전월지맥이고 우로가면 천태단맥 이다.

그러니 여기가 천태단맥의 분기점이 되는거다. 

언제고 이곳을 다시 올날이 올거 같다.

 

개금 이다.

넘들은 개암이라고 많이 하더라.

아직 덜 영글어 먹을때는 안됐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덕재고개에 내려 섰다.

고개 우측 저쪽으로 가면 공주시 의당면 덕학리고.........

 

고개 좌측 절리가면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다.

다방리는 다방이 많아서 다방리냐?

 

조금 더가니 마루금까지 치고 올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그러니 이곳도 고도가 엄청난 동네다.

해발 180m 가량이 찍힌다.

다방리 수랑골인거 같다.

 

돌아보니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국사봉(빨간색)이 저만큼 멀어져 있다. 

 

정서쪽의 저산은 천태산(빨간색)이 아닌가 한다.

다만 가보진 않았으니 장담은 못하겠다.

언젠간 저기도 가볼날이 있을게다. 

 

고생고생 끝에 이런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섰다.

지도를 보니 연기군쪽은 다방리 인거 같고 , 공주시쪽은 도신리 인거 같다.

선답자께선 이 고개를 삐티고개라 칭하셨다.

고개 이름이 독특하긴 한데 어디에 근거한 지명인지 모르겠다.

 

다시 뒤를 돌아본다.

좌,우로 두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오른쪽게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국사봉(빨간색)이고 , 왼쪽것도 국사봉(연두색) 이다.

왼쪽의 국사봉은 천태단맥상에 위치한 산이다.

 

지맥의 왼쪽 , 그러니까 연기군쪽을 보니 이쪽도 뭔산 하나가 뵌다.

지도를 보니 금성산(빨간색)일듯 하다.

저기도 가보지 않은곳이니 장담은 못하겠으나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가보게 될거다. 

 

정서쪽에 희미하게 뵈는산은 무성산(빨간색)이 확실해 뵌다.

남북으로 15km 이르는 산이라더니 여기서 봐도 참 길기도 하다.

 

땡겨봤다.

무성산 앞쪽으로 뵈는 산줄기가 천태단맥 이다.

  

그 영지버섯 다크면 정말 실하겠다.

누가보면 또 십년묵은 놈이라고 사기칠만 하겠네........

 

저 밑쪽으로 선답자께서 공주고개라 칭하신 고개가 뵌다. 

 

공주시 의당면쪽 방향이다.

저리로 내려서면 도신리란 동네가 나올거다.

 

여기도 전투식량이 있네..........

 

다시 뒤를 돌아본다.

국사봉(빨간색)과 국사봉(연두색) 사이로 낮익은 산 하나가 뵌다.

광덕산(똥색) 이다 

 

땡겨봤다.

광덕산이 확실하다. 

 

천태단맥 뒤로 무성산(빨간색)도 더 또렷히 뵌다.

 

공주고개를 떠나 오래지 않아 길을 잃었다.

그리곤 어느 마을에 내려섰다.

무더위에 지쳐 다시 오를 의지를 잃었다. 

그리곤 오늘의 산행을 그렇게 접었다.

아쉬움은 없다.

산을 타는 목적도 결국은 즐기기 위한거 아니겠는가?

더우면 쉬고 힘들면 관두면 되는 거다.

 

사진속의 저 물이 얼마나 션한지 모른다.

내 여지껏 저렇게 션한 물은 겪어보지 못했다.

허풍을 조금만 섞자면 냉장고서 방금 꺼낸거 같다.

 

저 앞에 보이는 마을이 연기군 서면 청라리 나발터 마을 이다. 

 

이쪽은 내가 길을 잃고 내려선 골짜기고........

요앞에 반사경 뒷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섰는데 원 마루금은 그 윗쪽의 밤나무 단지를 돌아나가는 산줄기가 되는 거다.

 

요걸보고 이곳이 청라리 나발터 마을 이란걸 알았다.

 

나발터 마을 유래비다.

죽 읽어보니 청라리 나씨가 살다 떠났다 하여 나발터라 한다는 유래도 있고 , 혹은 마을의 지형이 나팔을 닮은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단다.

또 임진왜란 전에 강릉김씨 김기은 이란 분이 세상의 소란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후 강름김씨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한다.

강릉김씨 라면 몇해전에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그려졌던 김순식 이란 인물이 떠오른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건국에 공을 세웠던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고보니 평소 역사드라마를 즐겨봤던게 산행하면서 요조조모 참 쓸데가 많은거 같다.

 

요건 또 뭔가 보자.

 

강릉김씨 김련 이란 분이 효자 셨단다.

아버지께서 편찮으시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였고 , 돌아가신후엔 3년간 시묘살이를 하셨단다.

 

효자강릉김련지문.

 

마을앞 느티나무 밑에선 동네 으르신들이 그늘에 앉아 이런저런 말씀들을 나누고 계시다.

나도 이곳서 근 한시간 가량을 버스를 기다리며 으르신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청라리 나발터 마을서 3시 50분발 버스를 타고 조치원 터미널에 나왔다.

근데 보다시피 천안가는 직행버스는 5시 50분 차다.

근 한시간 반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시내버스는 또 역전쪽으로 가야 된단다.

물어물어 찾아간다.

 

중앙시장 앞을 지나쳐 간다.

 

그리곤 다다른 역전앞 시내버스 정류소.

전의가는 5시차가 있다.

약 30분가량 남았다.

다음번엔 분명 이곳 인근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해야될거 같아 미리 주차할 곳을 찾아 주변을 어슬렁 거려 본다.

 

조치원역 전경 이다.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저 앞쪽 플랭카드에 적힌 글귀다.

 

님 생각만 하면 두주먹이 불끈 쥐어 집니다.

쥐어진 주먹을 분명 휘둘러야 될텐데 언제 어떤식으로 휘둘러야 될지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십시요.

 

인근을 제법 둘러봐도 마땅히 주차할 만한 곳은 찾지 못했다.

다음에 닥치면 뭔 방법이 있겠지......... 

 

그렇게 조치원서 버스를 타곤 대곡리서 내려 , 다시 700번 버스를 타고 집에 복귀했다.

내 집앞에 이르니 뭔 공사가 한창인데 저 건물들은 다 뭣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침에 5시 50분경에 집을 나섰다.

그리곤 광정가는 첫차를 타곤 정안서 또 택시를 타기위해 한참을 기다렸다.

결국은 정확히 7시 47분이 되서야 산행을 시작했다.

따지고보면 내집서 어물리까지 거리가 얼마 되도 않는데 꼬박 2시간이 걸린 셈이다.

올땐 더했다.

청라리서 산행을 접은 시간이 채 3시가 안됐었다.

근데 그냥 3시라고 하자.

나발터 마을서 버스 시간을 기다리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또 조치원에 내려서도 또 한참의 시간을 허비했다.

조치원서 버스를 타곤 대곡리서 내린후 또 한참의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700번 버스를 타고 집에 올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6시 50분을 향해 가고 있다.

역시나 그다지 먼거리도 아닌거 같은데 근 네시간 가까이 걸린거다.

올쩍 갈쩍 합쳐보면 길바닥서 허비한 시간이 근 여섯시간이 다된다. 

이게 지방의 현실이다.

지방 살기가 이만큼 힘들고 불편하다.

변절자 김모지사님!

이런건 아시구 공산당 운운하시는 거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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