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재 옛길을 넘다.
설 명절 쇠러 갔다가 오지재 옛길을 넘어 본다.
오지재는 인근의 주민들이 예산장을 보러 갈때 넘던 고갯길로 한때는 왕래가 빈번했던 고갯길 이다.
혼내깔.
머그네미.
집너머.
아버지께 기대 앉아.........
머그네미 고사티.
도랑길 오름길에 내려보는 머그네미.
천연 눈썰매장.
내 아버지의 땀과 숨결이 배어 있는 땅.
도랑골.
뒷편의 산줄기가 금북정맥.
도깨비 툼벙.
저앞에 잘록한 곳이 오지재.
오지재를 오르다 돌아본 모습.
저 뒤로 뵈는게 금계산 이다.
오지재 고갯길 바로밑의 집한채.
'광주'라 불리던 분 내외가 살던 집이다.
오지재 근방엔 이런류의 괴목들이 유난히 많다.
오지재 정상.
금북정맥상의 고개로 저기서 좌로가면 극정봉을 거쳐 차동고개로 갈수 있고 , 우로가면 천방산을 거쳐 각흘고개로 갈수 있다.
예산군서 설치한 이정표.
2008년도에 내가 걸어뒀던 팻말.
누군가 떼다가 다른쪽에 걸어뒀다.
때문에 소거리랑 머그네미쪽 방향이 반대가 되버렸다.
어쨌든 이 팻말로 인해 오지재란 지명이 다시 살아나는거 같아 뜻깊게 느껴진다.
이쪽이 소거리쪽 내림길 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고갯길을 마지막으로 넘어본게 1989년 이다
지금으로 부터 23년전.
아버지랑 봉냥 캐러 댕길때다.
이 고갯길을 넘으며 아버지께 들은 두가지 얘기가 생각이 난다.
첫번째는 소거리쪽 내림길 어딘가에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린 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그 구멍속에 산적이 숨었다가 지나는 길손의 물건을 뺏곤 했다는 이야기다.
두번째는 고갯길 어딘가쯤에 상당한 높이의 벼랑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사람키의 열질이 넘어 열질바위라 했던 기억이다.
그 커다란 나무란 것도 또 열질바위란 것도 내 머릿속에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뿐 실제론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윗사진의 나무가 그때의 그 나무가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그 규모가 내 머릿속의 그것에 비해선 너무나 작다.
방향을 잠시 바꿔봤다.
역시나 사람이 들어가 숨을 만한 규모는 아니다.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그때의 그 나무는 베어지고 없어졌을 수도.........
분명 이제는 이 고갯길을 넘는이가 없을텐데 그래도 이렇듯 희미한 고갯길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이렇듯.........
희미하긴 해도 문제없이 따라갈수 있을만큼 무난했다.
드뎌 보인다.
소거리 마을이다.
정식 행정구역 명칭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일거다.
막상 와서보니 이 느티나무는 기억이 난다.
맞다.
그때도 있었다.
그 느티나무는 이렇듯 누군가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선 수호목 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아무튼 규모가 엄청나다.
수호목으로 대접을 받아도 전혀 손색없을 엄청난 규모의 나무다.
그 나무밑엔 이렇듯 새암도 있는데 수량역시 엄청 났다.
어느 민가의 굴뚝이 특이하길래.....
정 반대편서 올려보는 오지재.
한가운데 옴폭한 곳이다.
돌아와 생각하니 아쉬운게 이쪽선 저 고개 이름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보지 못한거다.
물론 같은 이름을 쓸거 같긴 하지만........
다음번에 다시한번 넘어야 될거 같다.
오지재 좌측의 금북정맥 능선.
내 기억에 의하면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은 소거리란 마을이고 , 저앞쪽의 마을은 당거리란 마을이다.
당거리는 버스가 들왔던 기억도 나고..........
동네 어른께 여쭤보니 내 기억이 정확했다.
이곳서 마을 어르신 두분과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신기했다.
분명 내고향과 이곳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거기다 금북정맥 이라는 큰 산줄기가 가로막고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 내고향은 공주시고 , 여기는 예산군 이다.
차를 타고 여기서 내고향을 가자면 예산으로 유구로 또는 온양으로 한참을 돌아가야 다다를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신기하게도 내고향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머그네미도 , 당골도 , 도랑골도 , 금광도 또 곱돌광산도........
내고향에 사셨던 분들 또 살고 계신분들 왠만한 분들 함자도 줄줄 나온다.
누구네 집은 어디고 , 누구는 형편이 어땠고 또 누구는 뭘 잘하고 등등등...........
"우리 동네에 대해서 어찌 그리 잘알유?" 했더니
"그땐 이우지 처럼 지냈지......... , 그쪽 사람들이 예산장 댕길때 해지면 여기서 자구 가고 , 또 여기 사람이 해지면 자고 넘어 오고 그랬어."
이우지 처럼 지냈다는 그말씀이 결코 과장은 아닌거 같았다.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여쭤봤다.
아버지 함자를 듣더니 대번 그러신다.
"봉냥은 자네 아버지 만한 사람이 없었지"
"자네 아버진 참 말잘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아버지가 그립다.
소거리의 두분 어르신을 모시고 시간 가는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집에서 전화가 온다.
곧 처가에 가기로 해놓고 잠시 산책을 한다는게 거까지 넘어가고 말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뛰다시피 다시 오지재를 넘는다.
다시 내고향에 내려서 바라뵈는 모습이다.
얼마나 빨리 넘어왔는지 등짝에 땀이 흥건하다.
소거리에 '이정길'님 그리고 '이정윤'님 소중한 말씀 잘들었습니다.
제 아버지를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