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조가 12세조 (조이한)
숙종 1권, 즉위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12월 16일(을사) 4번째기사
정언 조이한이 선부의 일로 체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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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正言) 조이한(趙爾翰)이 아뢰기를,
“신(臣)의 선부(先父) 조상우(趙相禹)가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서로 허여했으므로, 선신(先臣)이 죽은 뒤의 가장(家狀)을 찬술(撰述)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외람되게 논계(論啓)하는데 있자니,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사간원(司諫院)에서 처음에는 공론(公論)을 따라야 한다고 간통(簡通)에 답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감히 가부(可否)를 말하지 못하겠다고 하여 전후(前後)가 반복되었으므로 체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8책 225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조선왕조실록 숙종 즉위년 편에 있는 내 12대조 할아버님에 대한 기록이다.
내 직계 조상중 이할아버님을 끝으로 더이상 벼슬을 한 기록은 없다.
이할아버님의 세째아들 그러니까 내게로 11대조 할아버지께서 지금의 내고향으로 들어 오셨다.
당시에 무엇때문에 지금의 내고향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다만 입에서 입으로 대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당쟁을 피하여 목숨을 보전키 위해 숨어 들었다' 혹은 '역적으로 몰려 숨어 들었다' 라고..........
뭔 얘길까?
당쟁을 피해 숨어 들었다?
역적으로 몰렸다?
하여 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좀 살펴봤다.
살펴보니 전해지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
우선 저당시 숙종 , 경종 , 영조에 이르는 시기는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숙종때는 서인과 남인의 극심한 당쟁이 있었고 , 경종과 영조때는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또 피튀기는 당쟁의 역사를 이어가던 시기였다.
근데 요쯤서 유심히 볼게 있다.
당시의 노론과 소론의 영수가 누군지 잘봐둬야 된다.
노론의 영수는 조태채란 사람으로 얼마전 드라마 장희빈에서 잘 그려졌던 인물이다.
소론의 영수는 조태구란 인물인데 조태채완 4촌 지간이다.
노론과 소론은 지금으로 따지면 민주당과 개나라당 쯤으로 보면되고 영수란 지금의 당총재 정도로 이해하면 아마도 무리가 없을거다.
그러니 4촌지간에 서로 다른 당파에 적을 둔거고 또 그것도 모자라 서로 다른 당파의 영수였으니 아마도 집안이 둘로 쪼개쪄 피튀기는 싸움을 했을건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거다.
그 와중에 싫든 좋든 양주조가라면 저 싸움에 말려들지 않을수 없었을 거고..........
추측컨데 내 11대조 할아버지께서는 저 상황속에서 위기 의식을 느끼셨을 거다.
그리곤 살기위해 지금의 내고향으로 몸을 숨기셨을 거고...........
결론적으로 그로인해 지금의 나도 존재하는 거네.
하지만 역시나 아무런 기록도 없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막연히 전해지는 이야기에 기인한 내 추측에 불과하므로 역시나 또 아니면 말고다.
어쨌든 당시 노론과 소론의 혹은 4촌형제 간의 서로 죽고 죽이는 당쟁의 끝은 둘다 패자로 보는게 맞을거다.
노론의 영수 조태채는 신임사화때 사약을 받아 죽었고 , 또 결국에는 노론에서 추대하려 했던 연잉군이 보위에 올랐으니 소론도 승리했다고 할수는 없을거다.
그렇게 보위에 오른 연잉군이 훗날 영조다.
연잉군의 어머니는 얼마전 드라마 장희빈에서 탤런트 박예진이 배역을 맡았던 무수리 출신 숙빈최씨고............
역사도 이렇게 접근하니 참 재밌다.